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고트 왕국 (문단 편집) ==== [[리우바 2세]], [[위테리크]], [[군데마르]], [[시세부트]] ==== 601년 12월 21일 레카레드 1세가 사망한 뒤 아들 '''[[리우바 2세]]'''가 18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러나 603년 고트족 귀족 '''[[위테리크]]'''가 반란을 일으켜 툴레도로 진격했고, 세습 왕조를 거부하고 게르만 관슴에 따른 선출 원칙을 선호하는 귀족들이 대거 호응했다. 리우바 2세는 생포된 뒤 폐위된 군주를 다루는 고트족 관습에 따라 오른손이 잘렸다. 그러나 위테리크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603년 여름 감옥에 갇혀 있던 그를 끌어내 처형했다. 그리하여 왕위를 공고히 한 위테리크는 [[동로마 제국]]과의 전면전을 단행했다. 당시 동로마 제국은 [[마우리키우스]]가 폐위된 후 [[포카스]] 황제의 폭정과 [[사산 왕조]] [[샤한샤]] [[호스로 2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인해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이베리아 반도에 별다른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다. 그는 이 점을 이용하여 이베리아 반도의 동로마 영토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의 목표는 베티카 남부 일대를 석권하고 [[지브롤터]]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원정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한 듯하다. 사군툼에서 일부 동로마군을 사로잡은 것 외에는 특별한 승전을 거뒀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가 로마 병사들과 자주 싸웠지만 적절한 영광을 거두지 못했다고 기술했다. 610년 툴레도 공의회에 카르타헤나 인근의 비가스트룸 시 주교가 참석한 것을 볼 때, 비가스트룸 시가 그의 치세 때 서고트 왕국의 영토로 귀속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한편 이 시기에 비스크인들의 북방 영토에 대한 약탈전이 수그러들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볼 때, 바스크인들을 상대로 성공적인 원정을 벌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의 군주 [[테우데리크 2세]]가 그의 딸 예르멘베르다와 결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강력한 프랑크 왕국과 손을 잡는다면 득이 된다고 본 그는 흔쾌히 허락했고, 예르멘베르다는 607년 샬롱으로 가서 테우데리크 2세와 약혼했다. 그러나 결혼은 이뤄지지 않았다. 테우데리크 2세의 할머니 브룬힐트가 결혼을 막았기 때문이다. 테우데리크 2세는 1년 후 예르멘베르다를 돌려보냈지만 지참금은 그대로 가졌다. 위테리크는 이에 분노하여 네우스트리아 왕 [[클로타르 2세]]와 테우데리크 2세의 형제인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을 맺었고,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와도 손을 잡아 테오도리크 2세를 협공하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내 벌어지지 않았는데, 기록이 미비해서 그 이유는 알 수 없다. 610년 4월, 위테리크는 왕궁에서 연회를 베풀던 중 암살당했다. 유해는 별다른 장례식 없이 곧바로 매장되었고, 공모자 중 한 사람이었던 '''[[군데마르]]'''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에브로 및 도루 강 계곡에 대한 지속적인 습격전을 벌이던 [[바스크]]인들을 토벌했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가 동로마군을 포위 공격했다고 기술했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았다. 군데마르는 동로마 제국 및 바스크족과 전쟁을 벌이면서 네우스트리아-아우스트라시아-[[랑고바르드 왕국]]과 손을 잡아 [[부르군트]] [[프랑크 왕국]]을 견제하는 위테리크 왕의 정책을 물려받는 한편, 종교 정책에서는 [[레카레드 1세]]의 가톨릭 진흥 정책을 이었다. 610년 10월 톨레도에 공의회를 소집해 일련의 법령을 포고했다. 이 법령에서는 톨레도를 모든 이베리아의 중심 도시로 선언했으며, 카톨릭이 비단 로마인만의 신앙이 아니라 모든 이베리아인의 종교임을 분명히 했다. 한편, 그는 위테리크와 갈등을 벌이다가 자신의 집권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불가르를 셉티마니아 공작으로 세우고 프랑크 왕국과의 모든 외교 업무를 일임했다. 그가 불가르와 주고받은 편지 일부가 남아있는데, 이에 따르면 아우스트라시아 왕 테우데베르 2세와 동맹 관계를 굳건히 유지하고 보조금을 동맹국에 대거 보내서 테우데리크 2세와 브룬힐트를 조속히 타도하려 했다.그러나 그의 계획은 생전에 실행되지 못했다. 그에게는 610년경에 사망한 아내 힐도아라가 있었지만 자녀를 두지 못했다. 612년 2월 또는 3월에 툴레도에서 자연사한 뒤 유력 귀족인 '''[[시세부트]]'''가 왕위에 올랐다. 시세부트가 왕위에 오른 직후, 아스투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리퀼라 또는 티우파디 백작이 즉시 이를 진압하러 출정했는데, 반란군의 기세를 꺾기는 했지만 아스투리아스 산맥이 워낙 험준했기 때문에 완전 제압엔 실패했다. 비슷한 시기, [[수인틸라]] 장군은 칸타브리아 부족 로콘 또는 룬콘 부족을 복속시켰다. 612년 바스크인들이 왕국의 북쪽 지역을 습격하여 약탈을 자행하자, 시세부트는 613년 최근 창설된 서고트 함대를 친히 이끌고 칸타브리아와 오트리고니아, 바스크, 바르둘리아, 카리스티아 등지의 해안에 상륙하여 칸타브리아-바스크인과 전투를 벌였다. 전투 결과가 어찌 되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지만, 바스크인들이 지배하는 산악지대를 평정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는 공연 예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에우세비오 데 타라스코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연극에 관심을 보이는 주교를 질책하고 서신을 전달한 사람을 바르치노의 주교로 봉헌하라고 명령했다. 또한 [[랑고바르드 왕국]]의 군주 아길루프의 아들 아달랄드에게 [[아리우스파]]를 버리고 가톨릭으로 개종하라고 권고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신앙심이 투철했다. 612년 8월 2일 [[부분일식]]이 이베리아 반도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자 각지의 시골에서 이교 관습과 미신이 부활했다. 이에 그는 613년 칸타브리아-바스크 원정 중에 일식에 관한 시를 짓고 세비야의 이시도르 주교에게 보내면서 백성들의 무지와 폭동에 대해 우려를 표명했다. 또한 614년 1월 13일, 타라코나에서 공의회를 개최해 598년 우에스카 공의회에서 성직자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야 한다는 교리를 확정지었다. 614년과 615년에 동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여 여러 번 승리했으며, 이 무렵에 말라가를 정복했다. 동로마 총독 카르사리우스가 기독교인끼리 피를 더 이상 흘리지 말자고 호소하자, 그는 이에 마음이 움직여 서로 포로를 교환하고 평화 협약을 맺기로 했다. 그와 카르사리우스 간에 오간 4개의 편지는 당시의 외교 절차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한편, 시세부트는 [[유대인]]에 대한 박해 정책을 펼쳤다. 그는 [[레카레드 1세]]의 "유대인은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다"는 법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현실을 개탄하며, 이 법령을 관철하기 위해 일련의 조치를 내렸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유대인이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할 수 없음을 분명히 했으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 노예와 재산을 기독교인들에게 합리적인 가격에 팔아야 하며, 아프리카나 프랑스에 있는 유대인에게 그들을 팔 수 없고, 거주지 근처에서만 판매가 이뤄져야 한다고 규정했다. 또한 유대인은 기독교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지만, 해방된 노예는 국가에 귀속되며 이전 유대인 주인의 후원은 금지되었다. 거짓으로 판매한 유대인은 가차없이 처형되었다. 이 법령은 612년 7월 1일에 발효되었으며, 이 날짜 이후에 기독교인 노예를 소유한 유대인이 발견되면 절반의 재산을 몰수하고 노예는 석방되었다. 그는 여기에 더해 기독교인을 유대인으로 개종시키는 것을 엄히 금지했다. 유대인으로 개종한 사람이 가톨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경우엔 공개 장소에서 채찍질을 하고, 끝까지 따르지 않으면 목을 베거나 왕이나 왕이 임명한 사람의 노예로 넘겨졌다. 또한 가톨릭인과 결혼한 뒤 개종을 거부한 유대인은 평생 추방되지만, 개종한다면 노예를 포함한 재산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낳은 자녀 역시 기독교인으로서 세례를 받아야 했다. 615년경에는 일부 유대인들을 상대로 기독교로 강제 개종시키는 정책을 추진했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유대인이 피살당하거나 해외로 망명했다. 시세부트는 문학에 관한 소양이 뛰어난 군주이기도 했다. 그는 61편의 라틴어 시를 집필했는데, 주요 주제는 [[천문학]]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시에서 천상에서 발생하는 현상은 신의 의지로 이뤄지는 것이 분명하다며,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신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게 신실한 신자의 도리라고 밝혔다. 세비야의 이시도르는 그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과학에 대한 관심을 품고 천문학과 지리학에 관한 백과사전을 집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